기억의 선택성과 목표 지향적 사고의 심리학적 분석
역사의 그늘 속에서 펼쳐지는 독립투사들의 비밀 작전을 그린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은 단순한 액션 스릴러를 넘어 인간 심리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기억의 선택성과 목표 지향적 사고라는 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분석해보면, 등장인물들의 행동 양식과 내적 갈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기억의 선택성: 우리 마음의 자기보호 메커니즘
인간의 기억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선택적이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선택적 기억(Selective Memory)'이라 부릅니다. 《암살》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이러한 선택적 기억의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안옥윤(전지현)은 자신의 트라우마적 과거와 가족사를 억누르고 독립운동이라는 사명에만 집중합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방어적 망각(Defensive Forgetting)'이라 불리는 현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현재의 목표 달성을 방해할 때, 우리 뇌는 종종 그 기억들을 의식 표면에서 억제합니다.
반면 염석진(이병헌)의 경우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해소하기 위한 선택적 기억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배신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을 재해석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기억을 구성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자기합리화는 내적 갈등을 감소시키는 심리적 방어기제입니다.
목표 지향적 사고와 기억의 재구성
목표 지향적 사고(Goal-Directed Thinking)는 인간이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고 과정과 기억을 조정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암살》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그들의 인지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와이 권총사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은 개인적인 감정과 안위보다 목표 달성을 우선시합니다. 그의 행동은 항상 '이것이 독립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기준으로 결정됩니다. 이러한 목표 지향적 사고는 '인지적 경제성(Cognitive Economy)'의 원리와 연결됩니다. 제한된 인지 자원을 가장 중요한 목표에 집중적으로 할당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 지도자 염석진(이정재)의 전략적 판단 역시 목표 지향적 사고의 산물입니다. 그는 개인적 감정이나 도덕적 고려보다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모든 판단의 기준을 둡니다. 이는 '실용적 추론(Practical Reasoning)'이라는 인지 과정으로, 목표 달성을 위한 최적의 수단을 찾는 사고 방식입니다.
트라우마와 기억의 파편화
영화 속 많은 인물들은 일제 강점기라는 극심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경험합니다. 트라우마적 경험은 종종 기억의 파편화(Memory Fragmentation)를 초래합니다. 완전한 이야기로 통합되지 못한 채 파편적 기억들이 의식 속에 침투하는 현상입니다.
안옥윤의 '쌍둥이 자매'에 관한 기억은 이러한 트라우마적 기억의 좋은 예시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핵심 기억을 억압하고 있지만, 특정 상황에서 그 기억의 파편들이 의식 표면으로 떠오릅니다. 이는 '침투적 기억(Intrusive Memory)'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흔히 나타납니다.
집단 기억과 역사적 내러티브
《암살》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의 문제도 다룹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민족적 트라우마는 모든 등장인물의 정체성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잊혀진 역사'를 되살리고, '왜곡된 내러티브'에 저항하기 위해 싸웁니다.
이는 현대 심리학에서 논의되는 '사회적 정체성 이론(Social Identity Theory)'과 연결됩니다.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적 내러티브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며, 그 내러티브를 보호하고 회복하려는 강한 동기를 갖게 됩니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적 행동은 단순한 애국심을 넘어, 집단적 기억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심리적 필요에 기반합니다.
역설적 기억: 잊기 위해 기억하기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역설적 기억(Paradoxical Memory)'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미래 세대가 자신들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아도 될' 자유로운 조국을 꿈꿉니다. 이는 "잊혀지기 위해 기억하는" 역설적 행위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초월적 목표(Transcendent Goal)'와 연결됩니다. 자신의 개인적 인정이나 기억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행동하는 인간의 고귀한 능력입니다. 《암살》의 독립투사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역사에 남지 않더라도, 그들이 꿈꾸는 자유 조국이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현대 사회와 선택적 기억의 함의
《암살》이 보여주는 선택적 기억과 목표 지향적 사고의 메커니즘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작동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정보 과부하 속에서, 우리는 더욱 선택적으로 정보를 기억하고 처리합니다. 소셜 미디어의 '필터 버블'은 이러한 선택적 기억의 현대적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인들은 다양한 목표(커리어, 학업, 관계 등)를 위해 끊임없이 기억을 재구성하고 감정을 조절합니다. "성공을 위해 부정적 경험은 잊어라"라는 자기계발서의 조언은 목표 지향적 사고의 실용적 적용입니다.
그러나 《암살》이 경고하듯, 지나친 선택적 기억은 자기기만과 역사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한 정신과 사회는 고통스러운 진실도 직면하고 통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결론: 기억의 윤리학
최동훈 감독의 《암살》은 단순한 역사 액션물을 넘어, '기억의 윤리학'을 다루는 철학적 작품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 것인가는 단순한 인지적 선택이 아닌, 깊은 윤리적 함의를 지닌 결정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선택하고, 어떤 목표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역사적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역사를 기억하고, 어떤 역사를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는가?
《암살》이 보여주는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선택은, 결국 '기억의 책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자유는 누군가의 '잊혀진 희생'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의 선택적 기억과 목표 지향적 사고가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가능케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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