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심리학으로 풀어보는 모호성과 기억의 왜곡
들어가며: 확신할 수 없는 미스터리의 세계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은 제71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여 국제비평가협회상(FIPRESCI)을 수상한 작품으로,
하루키 무라카미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한 미스터리 드라마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서사적 긴장감을 넘어, 인간의 인지 과정과 심리적 왜곡을 탐구하는 깊이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버닝》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모호함'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모호함을 통해 우리의 인지 과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는 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 《버닝》이 제시하는 심리적 현상들을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영화의 줄거리: 불확실성의 내러티브
《버닝》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 종수(유아인)가 어린 시절 이웃이었던 해미(전종서)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 중 자신의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종수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지만 고양이를 끝내 발견하지 못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이라는 부유한 청년을 소개합니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벤은 자신의 취미가 "창고(혹은 헛간)를 태우는 것"이라고 말하며, 종수의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얼마 후 해미가 갑자기 사라지고,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의심에 사로잡힙니다.
영화는 종수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관객은 그의 의심과 추측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인지심리학으로 본 《버닝》: 모호함이 만드는 심리적 현상들
1. 모호성 효과(Ambiguity Effect)와 그 영향
모호성 효과란 인간이 명확한 정보보다 애매모호한 정보에 접했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심리학자 다니엘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제안한 이 개념에 따르면,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그 불확실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버닝》에서 이 효과는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 고양이의 존재: 해미의 집에서 고양이는 보이지 않지만, 먹이와 모래상자는 사용된 흔적이 있습니다. 이 모호한 상황에서 관객은 '고양이가 있는가/없는가'라는 이분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 해미의 우물 이야기: 해미는 어린 시절 우물에 빠졌다가 종수에게 구출되었다고 말하지만, 종수는 이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해미의 가족은 그런 우물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모호한 서사는 해미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킵니다.
모호성 효과의 흥미로운 점은, 불확실한 정보일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적 해석에 더 강한 확신을 갖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각자 다른 결론에 도달하면서도 자신의 해석에 확신을 갖는 현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2. 기억 왜곡(Memory Distortion)의 메커니즘
기억 왜곡은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연구로 잘 알려진 현상으로,
인간의 기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되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이 생성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버닝》에서 기억 왜곡은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 종수의 어린 시절 기억: 종수는 해미를 어린 시절부터 알았다고 확신하지만, 그녀가 "못생겼다"고 놀렸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이후 그가 해미를 대하는 태도는 이 불완전한 기억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 해미의 성형수술: 해미는 종수를 만났을 때 "자신을 알아보느냐"고 묻고, 성형수술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종수의 기억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더욱 넓히는 요소가 됩니다.
연구에 따르면 강한 감정적 경험, 특히 불안이나 공포는 기억 형성과 회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종수가 점점 벤을 의심하면서 겪는 불안과 공포는 그의 기억과 판단을 더욱 왜곡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3.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과 주관적 진실
확증 편향은 인간이 자신의 기존 신념이나 가설을 지지하는 정보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버닝》에서 확증 편향의 작용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 벤에 대한 종수의 의심: 종수는 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편함을 느끼고, 이후 벤의 모든 행동을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벤이 하품을 할 때, 통화를 할 때, 심지어 웃을 때조차 종수는 그에게서 '범죄자'의 모습을 찾아냅니다.
- 헛간 태우기: 벤이 말한 "헛간 태우기"라는 모호한 표현은 종수의 의심을 극대화합니다. 이 표현이 실제로 방화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은유적인 표현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종수는 이를 '여성을 해치는 행위'의 은유로 확신하게 됩니다.
확증 편향의 강력한 점은 한번 형성된 의심이나 신념이 자기강화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종수의 의심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확고해지며,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버닝》이 던지는 인지심리학적 질문들
1. 인식의 한계와 주관적 진실
《버닝》은 궁극적으로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는가?"라는 인식론적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전부 종수의 시점에서 필터링되어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우리는 그가 보는 것만 볼 수 있고, 그가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습니다.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는
인간의 인식이 항상 '의미 구성(meaning-making)'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 기대, 감정을 통해 재구성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버닝》의 관객들이 각자 다른 해석에 도달하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의미 구성'의 개인차를 보여줍니다.
2.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아론 베크(Aaron Beck)는 이를 '인지적 불확실성 회피(cognitive uncertainty avoidance)'라고 불렀습니다.
《버닝》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영화 전반에 걸쳐 유지함으로써, 관객이 이야기의 빈틈을 자신의 방식으로 채워넣도록 유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인지 편향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에서 "명확한 결말보다 모호함을 통해 관객이 더 오래 영화를 기억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도 타당한 전략입니다.
'폐쇄효과(closure effect)'에 따르면, 완결되지 않은 과제나 이야기는 완결된 것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입니다.
3. 사회적 불평등과 인지 왜곡의 관계
《버닝》은 단순한 심리 스릴러를 넘어, 현대 한국 사회의 계층 격차와 그로 인한 심리적 영향을 탐구합니다.
종수가 느끼는 소외감과 열등감은 그의 인지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심리학자 마이클 로스(Michael Ross)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스트레스는 인지 기능과 판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빈곤이나 불평등 경험은 위협 인식을 높이고, 타인의 의도를 더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종수가 벤을 의심하는 과정은 단순한 개인적 질투를 넘어, 사회구조적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왜곡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 모호함이 비추는 인간 인지의 민낯
《버닝》은 미스터리 영화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인간의 인지 과정과 그 취약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보다 "우리는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해석하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창동 감독은 의도적으로 모호한 서사 구조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인지 왜곡의 과정을 영화적으로 재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결국 《버닝》이 보여주는 것은 확신의 위험성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불안, 욕망, 편견이 만들어낸 환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환상에 기반한 행동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영화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은 모호한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을 내리나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결론을 서두르는 편인가요?
-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하다고 생각하나요? 과거에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한 경험이 있나요?
- 당신이 누군가에 대해 형성한 첫인상이 이후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경험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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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에 관한 생각』 - 대니얼 카너먼
- 『기억의 오류』 - 다니엘 L. 샥터
-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 『예측 불가능한 삶』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이 글은 영화 《버닝》을 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의 특성을 고려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토론을 위한 하나의 시각을 제공하고자 합니다.